외계 대 침공 7일개봉 무료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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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평 1
인물이면 더 좋고요.)                 내공 많이 드리고 있습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제가요 방학숙제를 못했거든요 그래서 이 숙제를 하려고 해요.우리 나라의 훌륭하신 인물에 대해 자세 하게 써 주세요(독도에 관련된
감상평 2
1. 김유신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장군. 소정방이 이끈 당나라 군과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나라 군과 함께 고구려 정벌에 나서 여러 번 실패했으나 결국 성공하였다. 이후, 당나라 군사를 축출하는 데 힘써 한강 이북의 고구려 땅을 수복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져 놓았다.
2. 김춘추 (태종 무열왕) 신라 제29대 왕으로 김유신 등에게 5만의 군사를 주고 당나라 군사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켰다. 당의 율령제도를 모방한 관료체계를 정비하고 구서당이라는 9개 군단(軍團)의 설치하는 등 왕권을 확립하였다. 3. 광개토대왕 고구려 19대 왕(재위 391∼413). 고국양왕의 태자. 소수림왕의 정치적 안정을 기반으로 최대의 영토를 확장한 정복 군주이다. 한국 최초의 연호를 사용했다. 백제를 치고, 동예를 통합, 동부여를 정벌했다.
4. 장수왕 고구려 제20대 왕. 광개토대왕의 맏아들이다.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하고 적극적인 남하정책을 추진하여 광활한 영토를 차지하였다.  5. 문무왕 신라의 제30대 왕(재위 661∼681). 태종무열왕의 맏아들. 나·당연합군으로 660년 백제,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6년 당나라 세력을 몰아내고 삼국통일을 완수했다. :return false;" id=imgNormalView alt=문무왕 src="http://www.fotoya.net/PhotoyaThumb/2007/11/07/08/59/633387836723750000_3989d667-0f4d-4fd1-b378-f277b6a0ab6e.jpg.large.jpg" border=0 galleryimg="no"> 6. 장보고 신라의 무장. 해적들의 인신매매를 근절시키려고 해로의 요충지 청해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로 해적을 완전 소탕했다. 840년 일본에 무역사절을, 당나라에 견당매물사를 보내어 삼각무역을 했다. 
7. 곽재우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다. 
격파하였다.  12. 안중근 한말의 독립운동가. 삼흥(三興)학교를 세우는 등 인재양성에 힘썼다. 만주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하여 사형되었다. 사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return false;" id=imgNormalView alt=안중근 src="http://www.fotoya.net/PhotoyaThumb/2006/11/03/00/00/633249309634476250_0290e5ca-d281-4ef7-b626-3ec41d41987e.jpg.large.jpg" border=0 galleryimg="no"> 13. 안창호 한말의 독립운동가·사상가. 독립협회(獨立協會), 신민회(新民會), 흥사단(興士團) 등에서 활발하게 독립운동활동을 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14. 유관순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로 아우내 장터에서 군중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는 등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사하였다.   15. 김구 한국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상하이[上海]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신민회, 한인애국단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출처] 장수왕(고구려 제20대 왕)|작성자 vuddid59108. 김덕령 임진왜란 때 의병장. 의병을 정돈하고 선전관이 된 후, 권율의 휘하에서 의병장 곽재우와 협력하여, 여러 차례 왜병을 격파하였다. 생애와 도술을 묘사한 작자 ·연대 미상의 전기 소설《김덕령전》이 있다. 9. 묘청 고려시대의 승려로 서경천도(遷都)를 주장하였으나 사대주의자의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에 반란을 일으켰으나 김부식에게 섬멸되고 자신은 부하에게 피살되었다.  10. 이순신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옥포대첩, 사천포해전, 당포해전, 1차 당항포해전, 안골포해전,부산포해전, 명량대첩, 노량해전 등에서 승리했다.  11. 계백 백제 말기의 장군. 나당연합군이 백제를 공격하자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여 황산벌에서 신라 김유신의 군대와 맞서 네 차례나
16.안용복안용복은 1696년 봄에 조정의 허락을 받지 않은 채 제2차로 일본에 건너가서 울릉도와 독도
(우산도)가 조선 영토임을 명확히 하고 울릉도·독도를 수호하려고 하였다. 이때 안용복은
1696년 1월 일본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울릉도와 그 부속도서 독도가 조선 영토이고, 울릉
도·독도에서 일본 어민의 고기잡이 도해(渡海)를 금지한 사실을 알고 행동했는지 모르고
행동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안용복은 이전부터 대마도 일본인들과 통교가 있던 인물이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고 일본어도 능숙했으므로, 도쿠가와 막부 관백의 결정을 미리 알고 출발했을 가능 성도 높
다.
안용복은 1696년(숙종 22년) 봄에 울산에 가서 울릉도에 가면 해산물이 많다고 하면서 순천
송광사의 장사꾼 중 뇌헌(雷憲), 글을 잘 하는 이인성(李仁成), 사공 유일부(劉日夫), 유봉
들어갔다. 과연 울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석(劉奉石), 김길성(金吉成), 김순립(金順立) 등 16명을 모아 울릉도에
릉도에는 이미 일본 배들이 건너와 정박해 있으므로, 앞서 쓴 바와 같이 안용복은 “울릉도
는 본래 우리 영토인데 어찌 감히 국경 을 넘어 침범하는가. 너희를 모두 묶어 마땅하다”
고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우리는 본래 松島(송도: 우산도, 독도) 에 사는
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그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고 거짓
말로 모면하려 하였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그러자 안용복은 앞서 쓴 바와 같이 다시 “송도(松島)는 곧 우산도 (于山島)인데, 이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가 감히 여기에 산다 고 하느냐(松島卽子(于)山島 此亦我國也 汝敢往
此島)”고 꾸짖고 이들을 쫓아냈다. 안용복 등이 이튿날 새벽 배를 타고 우산도(于山島: 독
도)에 들어가 보았더니 일본 어부들이 솥을 걸어 놓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었다. 안용복 등
타고 돌아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이 막대기로 걸어 놓은 솥을 부수면서 큰 소리로 꾸짖으니 일본 어부 모두 배를
갔다고, ‘숙종실록 ’과 ‘증보문헌비고’ 등에 기록되어 있다.
안용복 등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은기도(隱岐島: 玉岐島)로 들어갔다. 은기도 도주
는 찾아온 이유를 물었다. 안용복은 큰 소리 로, “몇 년 전에 내가 이곳에 들어와 울릉도
·우산도(독도) 등의 섬을 조선 땅으로 정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가기에 이르렀는데, 일본
격식이 없이 또 우리 영토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라고 말하였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은 정해진
이에 은기도 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백기주(伯耆州) 태수에게 전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오
래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이에 안용복 등은 분격하여 배를 타고 백기주(지금의 시네마 현)로 향하였다. 안용복 등은
스스로 ‘울릉·우산 양도 감세장(鬱陵·于 山兩島監稅將)’이라고 칭하고 백기주 태수에게
보내 통고하니, 백기주 태수가 인마를 보내 맞이하였다. 안용복은 위의(威儀)를 갖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사람을
추어 백기주 태수와 마루 위에 마주 앉고, 다른 사람들은 모두 중간 계단에 앉았다. 백기주
태수가 일본에 들어온 이유를 물으니, 안용복은 “전날 두 섬(울릉도와 독도…인용자)의 일
로 문서를 받았음이 명백한 데도 대마도 도주가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 번
사절을 보내서 불법으로 횡침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대마도 도주의) 죄상을 낱
태수가 이를 허락하으므로 안용복은 이인성에게 상소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낱이 진술하겠다”고 따졌다. 백기주
문을 지어 관백에게 정납케 하였다.
당시 대마도 신·구 도주는 안용복의 문제 제기와 관련하여 두 가지 죄를 감추고 있었다.
그 하나는 도쿠가와 막부 관백이 백기주 태수에게 명령하여 써 준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 영
토가 아니라 조선땅이라는 문서를 빼앗아 없애고 도리어 일본 땅 죽도(울릉도)에 조선 어부
들의 침범을 엄금해 달라고 문서를 위조한 죄가 있었다. 다른 하나는 교역상 조선측이 막부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에 보낸 물품의 도량형을 속인 것이다.
조선은 쌀 15두(斗: 말)를 1섬으로 한 것을 대마도 도주는 7두를 1 섬으로 했고, 조선은 베
(布) 30자(尺)를 1필로 보냈는데 대마도 도주는 20자를 1필로 했으며, 조선이 보낸 종이 1
묶음(束)을 대마도 도주는 3묶음으로 나눠 그 차액을 착복하였다.
머물러 있다가 이 소식을 듣고 백기주 태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이때 마침 대마도 도주의 아버지가 백기주 관아에
수를 찾아가, “만약 이 상소가 올라가면 내 아들은 반드시 중죄를 얻어 죽을 것이므로 이
상소를 올리지 말아달 라”고 애걸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이에 안용복에게 그 상소를 올리
지 말라고 권고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우선 울릉도·독도를 침범했 다가 안용복에게 쫓겨온
일본 어부 15명을 적발하여 처벌하였다. 또 한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에게 “두 섬(울릉도와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침범하여 넘어가는 자가 있거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우산도…인용자)이
나 도주(대마도 도주…인용자)가 혹시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국서를 작성하여 역관을 정하
여 들여보내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할 것이다 (兩島旣屬爾國之後 或有更爲犯越者 島主如或橫
侵 竝作國書 定 譯官入送 則當爲重處)”는 약속을 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안용복 등에게 식량을 공급해주고, 파견수행원을 정 하여 호송해 주었으며,
적장 송강과 동일 인물인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  18~19 는 중국인물 ㅎ힘들었음 ㅎㅎ; 채택점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화폐도 가지고 가라고 주었으나 안용복·뇌헌 등은 완강히 사양하고 귀국하였다. 17. 을지문덕 고구려 명장. 수(隋)나라 군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적진에 가 형세를 정탐하였으며 후퇴작전을 이용하여 적군을 지치게 만든 다음, 거짓 항복을 하여 후퇴하는 수나라 군을 살수에서 공격하였다.고구려 명장. 수(隋)나라 군이 고구려를 침범하자 적진에 가 형세를 정탐하였으며 후퇴작전을 이용하여 적군을 지치게 만든 다음, 거짓 항복을 하여 후퇴하는 수나라 군을 살수에서 공격하였다.    18. 마량 마량(馬良, 187년 ~ 223년)의 자는 계상(季常)이다. 양양(襄陽) 의성 출신. 흰 눈썹을 가지고 있어 백미(白眉)라고도 불리어졌으며, 수재로서 다섯형제 중 제일이었는데, 이후 여러 사람 중 뛰어난 사람을 일컫어 백미라 부르게 됐다. 동생 마속과 함께 유비를 섬겼다. 동오(東吳)와 친선을 유지하고 남만을 회유하는 데 공이 컸다. 유비에게 형주사군(荊州四郡) 정벌을 제안하였으며 관우가 형주를 지킬 때 내정을 보좌했다. 오나라와의 전쟁때 유비에게 칠백리 걸친 촉군의 문제를 제기한 인물이며 제갈량의 남만(南蠻) 정벌 전에 요절하였다. 관직은 종사(從事)였다.   19. 송강 (급시우 송강) 14세기에 편찬된 《송사》(宋史)에 따르면, 송강이 거느리는 반란군은 황하 북쪽의 하삭에서 봉기하여, 1121년에 회남의 여러 지방을 휩쓴 후 관군의 토벌을 받아 경동(북송의 수도 개봉의 동쪽으로 현재의 산둥 성 서부), 장강 북안으로 나아가 열 개의 군을 공략했다.송강의 세력을 무서워한 북송 조정은 후몽(侯蒙)의 건의에 따라 송강의 죄를 사하고 장군 직위를 주어서 당시 강남을 석권하고 있다 방랍의 반란군을 토벌시키려고 했지만, 후몽의 죽음으로 실현하지 않았다. 그 후 산동 반도의 해주를 침공할 때, 지주의 장숙야에 패배하고 항복했다.송사(宋史)에 기록된 후몽의 상주문에는 송강은 36인으로 제위를 횡행하고, 수만 명 있어도 대항할 수 없을 만큼 신출귀몰하다. 송강의 재능이 뛰어난 것임에 틀림없다고 되어 있다.송사와는 다른 사료에서는 송강 반란의 진압된 후에 방랍 토벌군의 안에 송강이라고 한 이름의 장군이 있던 것이 명백하지만, 이 인물이 송사에 기록된
감상평 3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풍신수길), 1536~1598.9.18]  오와리국[尾張國:愛知縣]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木下彌右衛門]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키노시타 도키치로[木下藤吉郞]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으며, 29세 이후에는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라고 하였다가, 다이죠다이진[太政大臣], 간파쿠[關白]가 되어 도요토미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의 모반으로 혼노지[本能寺]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고 실권을 장악하였다. 이때부터 다이라[平]씨를 성씨로 사용하였으며 1585년 관백(關白)이 되자 후지와라[藤原]씨로 성을 다시 바꾸었다. 도요토미[豊臣]라는 성씨는 1586년부터 사용하였다.오다 노부나가의 뒤를 이어 실권을 장악한 그는 1587년 반대세력을 모두 굴복시키고 일본을 통일함으로써 모모야마[桃山]시대를 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미천한 집안 출신으로 일본 천하를 지배하고 통치권을 행사할 군주가 될 신분이 아니었다. 일본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로 평가되는 오다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자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자신을 꾸미고 돋이게하는 노력을 하였다. 일본 국내가 통일되자 그동안 어떤 통치자도 시도하지 못했던 중국 대륙을 정복하여 자신의 위세를 떨치고자 시도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 대륙 정복으로 오다 노부나가에 집중된 국민들의 존경심과 평가가 자신에게 쏠릴 것으로 기대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과 교류가 있는 대마도주에게 명하여 조선에 명나라 정복을 위한 협조를 요청하였다. 4년동안 교섭을 진행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가자 마침내 1592년 조선을 침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나고야[名護屋;현재히젠의 가츠라 지역]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20만 명이 넘는 수군과 육군을 선두로 부산포를 공격하였고 서울에서 평양까지 파죽지세로 몰아부쳤다. 겨울이 되면서 전쟁의 어려움이 가중되자 명나라와 평화교섭을 벌였지만 실패하였다. 이로인해 이듬해 1597년에 다시 군대를 동원하여 정유재란을 일으키지만 국력만 소모하는 결과를 낳게된다. 정유재란 중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않고 후시미[伏見] 성에서 질병으로 사망하였다.
감상평 4
이순신장군 이순신은 1545년 3월 8일(음력) 서울 건천동에서 태어났으나, 경제적 빈곤으로 인해 어려서 외가인 충남 아산으로 이사하여 그 곳에서 성장하였다.
28세가 되던 1572년 8월 처음으로 무관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마사고로 낙방하였고, 4년 뒤인 1576년 2월 비로소 식년무과에 합격하였다. 32세라는 뒤늦은 나이에 북방의 말단 수비장교로 시작된 이순신의 관직생활은 평탄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적 배경이나 경제적 능력이 없고, 성품이 강직하고 원칙을 중시하여 상관들로부터 잦은 모함과 미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순신이 정읍현감을 거쳐 1591년 2월 유성룡의 추천으로 드디어 전라좌도 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있다. 이 중 수석의 위치에 있었던 것이 알천인데, 4영지회의의 구성원들은 유신의 위엄에 복종하였다고 한다. 이는 귀족회의의 공식적인 수뇌는 상대등인 알천이었으나, 비공식적인 실세는 그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이를 통해 알천이 전통적 귀족이 아닌 그와 상의하여 왕위를 양보하게 된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왕위가 태종무열왕에게 돌아가게 된 데에도 태종무열왕에 대한 그의 긴밀한 지지가 크게 작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태종무열왕의 즉위 후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신라본기에는 태종무열왕의 즉위 다음 해 그의 관등이 대각간(大角干)으로도 나타난다. 그 해 10월에는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 지소와 혼인하였다. 이는 태종과의 결속이 더욱 긴밀해졌음을 반영하는 동시에, 종전과는 달리 가야계 출신으로서의 제약을 벗어나 왕실과도 통혼하게 되었음을 보여 준다.660년 정월에는 귀족회의의 수뇌인 상대등이 되어, 삼국통일 전쟁 과정에서 신라를 이끄는 중추적 구실을 하게 되었다. 그 해 그는 신라군을 이끌고 당나라 군대와 함께 백제를 멸하였다. 태종무열왕을 뒤이어 문무왕이 즉위한 뒤에도 그의 정치적 비중은 약화되지 않았다. 661년(문무왕 1) 6월에는 고구려를 원정하였다.이 원정에서 그는 고구려 평양성을 공격하다가 군량이 떨어져 곤경에 처한 당나라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고구려 중심부까지 왕복하는 결사적인 수송작전을 펼쳤으며, 당나라 군대가 퇴각하자 이듬 해 정월 고구려군의 매복과 추격을 물리치고 돌아왔다.663년에는 백제 부흥을 꾀하는 백제 유민과 그들을 지원하는 왜(倭)의 연합 세력을 격파하였고, 664년에도 백제 유민이 사비성에서 봉기하자 은밀한 계책을 일러 주어 평정하게 하였다.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668년 신라군의 총사령관 격인 대총관(大摠管)이 되었다. 그러나 늙고 병이 들어 원정에 참가하지는 못하고 왕경(王京)에 남아 원정을 떠난 왕을 대신하여 신라 국내의 통치를 담당하였다.문무왕과 생구관계(甥舅關係)였을 뿐만 아니라, 고구려 원정군의 수뇌인 김인문과 김흠순도 생질과 아우였던만큼 국가의 원로로서 고문과 지도적 구실을 하여 신라 진영의 단결과 전략 수립에 기여했던 것으로 보인다.고구려를 평정한 직후에는 다시 한 등급을 높인 ‘태대서발한(太大舒發翰)’이 제수되고, 여러 가지 특전을 포상받았다. 그 뒤 자신이 직접 일선에서 정치나 군사적 일을 수행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신라 지배층 원로로서의 자문역은 계속한 것으로 보이며, 고구려 멸망 후 본격화된 당나라와의 투쟁에서도 지도적인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672년 석문(石門)벌판의 전투에서 신라군이 당나라에 참패했을 때 문무왕이 그에게 자문을 구한 사실이 기록에 나타난다.그는 일찍부터 당나라의 대국주의 야욕을 간파하고 그에 대비하고 있었다. 660년에는 그가 백제군의 결사대를 격파하느라 당나라군과의 합류 지점에 늦게 도착하자,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이를 빌미로 신라 장군의 참수(斬首)를 명하여 신라군의 통수권을 장악하려 하였다. 이 때 그는 먼저 당나라군과 결전하겠노라며 단호히 맞서 소정방의 기도를 무산시켰다.또한 백제가 정복된 해에 당나라는 그와 김인문에게 백제지역을 분봉(分封)해 주겠다고 유혹함으로써 신라 지배층의 분열을 획책하며 신라를 침공할 기회를 노렸다. 그러나 이 때 역시 이러한 유혹을 거절하여 신라 지배층의 결속을 굳힘으로써 당나라의 계략을 무산시켰다.한편, 고구려가 엄존하는 상황에서 당나라와의 정면 대결을 피해 신라군을 백제유민군으로 위장하여 당나라군의 행동에 군사적인 대처를 하였다. 당시 소정방은 신라는 상하가 굳게 결속되어 작지만 쉽게 정복할 수 없다고 본국에 보고하였다 한다.그 뒤에도 당나라는 665년에 그를 봉상정경 평양군 개국공 식읍 2,000호(奉常正卿平壤郡開國公食邑二千戶)로 봉하는 등 유혹의 손길을 뻗쳐 왔다. 그러나 그는 국제관계 속에서 당나라가 신라에 대해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를 간파하고 이에 대처함으로써 당나라의 침략 야욕을 분쇄할 수 있었다.그 이면에는 스스로를 엄격히 단속하며, 신라 다중(多衆)의 결속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한결같은 노력이 있었다. 연속되는 출정 중에 가족들이 기다리는 집 앞을 돌아보지도 않고 지나친 일이나, 혹독한 추위 속의 행군에 군사들이 지치자 어깨를 드러낸 채 앞장섰다는 일화, 그리고 아들인 원술이 당나라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고 도망해 오자 왕에게 참수형에 처하라고 건의하고 끝까지 용서하지 않은 일 등은 이러한 노력의 단면들이다.그가 죽자 왕은 성대한 의장을 갖추어 금산원(金山原 : 지금의 경주시 송화산 기슭으로 추측됨)에 장사지내게 하고, 비를 세워 공적을 기록하게 했다 한다. 뒤에 흥덕왕(≪삼국유사≫에는 경명왕 때라 함)은 그를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봉하였다 강감찬948(정종 3)∼1031(현종 22). 고려 전기의 명신. 본관은 금주(衿州 : 지금의 서울시 금천). 초명은 은천(殷川). 경주에서 금주로 이주해 호족으로 성장한 여청(餘淸)의 5대손이며,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이다.983년(성종 3) 과거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한 뒤 예부시랑이 되었다. 1010년(현종 1) 거란의 성종(聖宗)이 강조(康兆)의 정변을 표면상의 구실로 내세워 서경(西京)을 침공하자 전략상 일시 후퇴할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현종은 나주로 피난해 사직을 보호케 하였다. 이듬해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한림학사·승지·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중추원사(中樞院使)·이부상서(吏部尙書) 등을 지냈다.1018년(현종 9) 경관직인 내사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와 외관직인 서경유수(西京留守)를 겸하였다. 서경유수는 단순한 지방의 행정관직이 아니라 군사지휘권도 행사하는 요직으로 거란의 재침에 대비하기 위한 조처였던 것으로 보인다.그 해에 거란의 소배압(蕭排押)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침공하였다. 그는 서북면행영도통사(西北面行營都統使)로 총사령관격인 상원수대장군이 되어 부원수 강민첨(姜民瞻) 등과 함께 거란군을 격파하였다. 특히, 구주 대첩은 대외항전사상 중요한 전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거란의 침입에 대비해 고려의 20만 대군은 안주에서 대기하다가 적의 접근을 기다려 흥화진(興化鎭 : 평안북도 의주군 威遠面)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정예기병 1만2천명을 산기슭에 잠복 배치한 뒤 큰 새끼줄로 쇠가죽을 꿰어 성 동쪽의 냇물을 막아두었다가 때를 맞추어 물을 일시에 내려보내 큰 전과를 거두었다.전투에서 패전한 거란군은 곧바로 개경(開京)을 침공하려 했으나, 자주(慈州)와 신은현(新恩縣)에서 고려군의 협공으로 패퇴하였다. 특히 구주에서 전멸에 가까운 손실을 입은 거란군 10만 가운데 생존자는 겨우 수 천에 불과했다고 한다.그 전공으로 현종은 친히 영파역(迎波驛)까지 마중을 나와 극진한 환영을 하였다. 강감찬으로 인해 거란은 침략야욕을 버리게 되고 고려와는 평화적 국교가 성립되었다. 그는 거란과 항전했던 장군으로서 뿐만 아니라 개경에 나성(羅城)을 쌓을 것을 주장해 국방에 큰 공을 세우기도 하였다.전란이 수습된 뒤 검교태위 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천수현개국남 식읍삼백호(檢校太尉門下侍郎同內史門下平章事天水縣開國男食邑三百戶)에 봉해지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의 호를 받았다. 1020년에는 특진검교태부 천수현개국자 식읍오백호(特進檢校太傅天水縣開國子食邑五百戶)에 봉해진 뒤 벼슬에서 물러났다.그러나 1030년(현종 21)에 다시 관직에 나아가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고, 이듬해 덕종이 즉위하자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 특진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 식읍일천호(開府儀同三司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特進檢校太師侍中天水縣開國侯食邑一千戶)에 봉해졌다.현재 그의 묘는 충청북도 청원군 옥산면 국사리에 있다. 현종 묘정에 배향되고 문종 때에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兼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인헌(仁憲)이다. 그의 저서로는 ≪낙도교거집 樂道郊居集≫과 ≪구선집 求善集≫이 있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허준허준은 1546년(명종 1) 지금의 서울특별시 강서구 가양동에서 아버지 허론(許)과 어머니 김(金)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천허씨의 시조인 허선문(許宣文)의 20세손이다. 할아버지 곤(琨)은 무관으로 경상우수사를 지냈고 아버지 론 역시 무관으로 용천부사를 지냈다. 허준은 어릴 때 경상도 산청으로 이사하여 이곳에서 성장한 것으로 전해진다. 허준은 이곳에서 어려서부터 의사수업을 시작했다. 그는 서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신분제 사회에서 벼슬길로 나가지 못하고 당시 중인이나 서얼들의 업으로 되어 있던 의학의 길을 택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허준의 총명과 열성은 이미 20대에 그를 전국적으로 유명한 의사가 되게 했다. 1569년 6월 그의 나이 24세 되던 해 부제학 유희춘(柳希春)의 부인을 치료하기 위해 서울로 초치되었고 이듬해에는 유희춘의 병까지 치료하게 되어 서울 장안에서 명성이 높았다.왕건877(헌강왕 3)∼943(태조 26). 고려 제1대왕. 재위 918∼943. 성은 왕(王). 이름은 건(建). 자는 약천(若天). 송악(松岳 : 지금의 경기도 개성) 출생. 아버지는 금성태수 융(隆)이며, 어머니는 한씨(韓氏)이다.후삼국시대에 궁예(弓裔)가 한반도 중부지방을 석권, 철원(鐵圓 : 지금의 강원도 鐵原)에 도읍을 정하자 그의 부하가 되었다. 900년에 궁예의 명령으로 광주(廣州)·충주·청주(靑州 : 지금의 충청북도 청주) 및 당성(唐城 : 지금의 화성군 남양)·괴양(槐壤 : 지금의 충청북도 괴산) 등의 군현을 쳐서 평정한 공으로 아찬(阿0xC89F)이 되었다.903년 3월에는 함대를 이끌고 서해를 거쳐 후백제의 금성군(錦城郡)을 공격, 함락시켰다. 그리고 부근 10여 개 군현을 빼앗아 나주를 설치,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돌아왔다.또한 양주수(良州帥) 김인훈(金忍訓)이 위급함을 고하자, 궁예의 명을 받고 구해주었다. 그리하여 궁예와 주위의 신망을 얻게 되었으며, 그 동안의 전공으로 알찬(閼0xC89F)으로 승진하였고, 913년에는 파진찬(波珍0xC89F)에 올라 시중(侍中)이 되었다.그 뒤 궁예의 실정이 거듭되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신숭겸(申崇謙)·복지겸(卜智謙) 등의 추대를 받아, 918년 6월 궁예를 내쫓고 새 왕조의 태조가 되었다. 철원의 포정전(布政殿)에서 즉위해 국호를 고려(高麗), 연호를 천수(天授)라고 하였다.그러나 그에게는 많은 난관이 가로놓여 있었다. 먼저, 안으로는 환선길(桓宣吉)·이흔암(伊昕巖) 등 왕권에 도전하는 적대세력에 대처해야 하였다. 또한 민심을 수습하고 호족세력을 회유, 포섭하는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었다. 이와 함께 밖으로는 후백제 견훤(甄萱)의 세력에 맞서 싸워야 하였다.태조가 즉위 초부터 가장 역점을 둔 국내정책은 민심안정책이었다. 신라 말기 이래 문란해진 토지제도를 바로잡고, 궁예 이래의 가혹한 조세를 경감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취민유도(取民有度)의 표방은 구체적인 예가 될 것이다.이와 동시에,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등장한 호족세력에 대해서는 유력한 호족들의 딸과 정략적으로 혼인했으며, 지방의 호족 및 그 자제들을 우대하는 정책을 펴나갔다.태조는 궁예나 견훤에게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는 정치적 역량을 지니고 있었고, 짧은 기간 동안에 어느 정도 새 왕조의 왕권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그리하여 919년(태조 2) 1월에 개성으로 도읍을 옮겼다.신라·후백제·고려의 후삼국관계가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920년부터였다. 태조는 신라에 대해 친화정책을 썼다. 이 해 10월 견훤이 신라를 침범하자, 신라에 구원병을 보냈는데, 후백제와의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신라와의 친선이 필요했던 것이다.후백제와는 초기에 화전(和戰) 양면정책을 썼다. 이처럼 신라·후백제와의 미묘한 관계 속에서 새 왕조의 안정과 국력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다.대체로 후백제와의 군사적 대결에서 고려는 열세를 면하지 못하였다. 후백제는 고려와 신라의 통로를 차단할 목적으로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일원을 군사적으로 압박하였다.이 지역은 고려 역시 중요시했으므로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930년 태조는 고창(古昌 : 지금의 경상북도 안동) 전투에서 견훤의 주력부대를 대파함으로써 비로소 군사적 우위를 차지하였다.935년 왕실 내분으로 왕위에서 축출된 견훤을 개성으로 맞아들여 극진하게 대우했으며, 같은 해 10월 신라왕의 자진항복을 받게 되었다.이로써 후삼국통일의 주역이 될 가능성이 확실해졌다. 마침내, 936년 후백제와 일선군(一善郡 : 지금의 경상북도 구미)의 일리천(一利川)을 사이에 두고 최후결전을 벌여 후백제를 멸하고 후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태조는 통일 직후 ≪정계 政誡≫ 1권과 ≪계백료서 誡百寮書≫ 8편을 저술, 중외에 반포하였다. 이 저술들은 새 통일왕조의 정치도의와 신하들이 지켜야 될 절의를 훈계하는 내용으로 생각되나 현재 전하지 않는다.그리고 죽기 얼마 전에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를 내전으로 불러들여 〈훈요십조 訓要十條〉를 친수(親授)해 후계자들이 귀감으로 삼도록 부탁하였다. 〈훈요십조〉는 그의 정치사상을 엿보게 하는 귀중한 자료이다. 시호는 신성(神聖)이며, 능은 현릉(顯陵)이다 견훤본성은 이(李). 황간견씨(黃磵甄氏)의 시조이다. 상주(尙州) 가은현(加恩縣 : 지금의 문경)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자개(阿慈介)로 농민출신 장군이었다. 당시 신라는 혜공왕(惠恭王) 이후 왕실의 권위가 떨어져 중앙 정치가 매우 혼란스러웠으며, 지방에서도 호족들이 독자 세력을 형성하여 각 지방을 나누어 지배하고 있었다. 서남해 방위에 공을 세워 변방비장(邊方裨將)으로 있던 견훤은 혼란한 틈을 타 892년(진성여왕 6)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무진주(武珍州 : 지금의 광주) 등 여러 성을 공격하고, 900년(효공왕 4) 완산에 도읍을 정하여 후백제를 세웠다.스스로 왕위에 오른 견훤은 "신라서면도통지휘병마제치지절도독 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新羅西面都統指揮兵馬制置持節都督全武公等州軍事行全州刺史兼御史中丞上柱國漢南郡開國公食邑二千戶)라고 자칭했다. 북원(北原 : 지금의 원주)의 양길(梁吉)에게 벼슬을 내려 회유하고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등 세력 확장에 힘썼다. 후고구려의 궁예(弓裔)와는 자주 충돌했다. 그뒤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 지금의 합천)을 비롯한 10여 성을 빼앗았으며, 927년(경순왕 1)에는 경주를 공격하여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경순왕을 세우는 등 후삼국 중 가장 큰 세력을 이루었다. 왕건이 세운 고려에도 조물성(曺物城 : 지금의 안동 또는 상주 부근) 공산(公山)에서 이기는 등 군사적 우위를 유지했다. 외계 대 침공 7일개봉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순신은 왜군의 침략을 예견하고 수군의 전력을 증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먼저 군기를 확립하고 군비를 확충하였으며, 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거북선과 판옥선, 지자와 현자총통 등의 무기를 제작하였다. 특히 조선의 돌격전함인 거북선은 적의 월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하기 위해 둥근 지붕에 못이 박혀있고, 전우좌우 사방에서 대포를 쏠 수 있어서 수많은 적선 사이에서도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는 강력한 전선이었다. 임진왜란의 발발을 하루 앞둔 1592년 4월 12일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나대용이 거북선 제작을 완료하고 거기서 지자와 현자총통의 시험 발사를 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김좌진본관 안동(安東). 자 명여(明汝). 호 백야(白冶). 충남 홍성(洪城) 출생. 형규(衡奎)의 2남이다.부유한 명문대가 출신으로 15세 때 가노(家奴)를 해방할 정도로 진취적 개화사상이 강하였다.1905년(광무 9) 서울에 올라와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을사조약 체결 이후 국권회복의 신념을 가지고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며 국운을 바로잡을 것을 결심하였다.1907년(융희 1) 고향으로 돌아와서 가산(家産)을 정리하여 호명학교(湖明學校)를 세우고, 대한협회 홍성지부를조직하는 등 애국계몽운동을 하였다. 다시 서울로 올라와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에 참여하면서 1909년 한성신보의 간부를 지냈고, 안창호(安昌浩) 등과 함께 서북학회(西北學會)를 조직하였다.그리고 서북학회의 산하교육기관인 오성학교(五星學校) 교감을 역임하였으며 청년학우회 설립에도 참여하였다.1911년 군자금 모금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투옥되어 2년 6개월 간 복역하였고, 1916년 노백린, 신현대 등과 함께 광복단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만주로 망명하여 대종교(大倧敎)에 입교하였으며, 그 해 12월 무오독립선언서에 민족지도자 3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서명하였다.1919년 대한정의단의 기반 위에 군정부를 조직하여 본거지를 왕칭현에 두고 5분단 70여 개의 지회를 설치한 뒤광복운동을 위한 기반을 조성하였다. 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휘하의 북로군정서로 개편한 뒤, 그 기관의 총사령관이 되어 1,600명 규모의 독립군을 훈련시켰다.이어 사관연성소(士官練成所)를 설치하여 사관훈련과 무기입수에도 힘썼다.기관총 7문 등으로 무장한 김좌진 휘하의 독립정예군은 만주 일대에서는 가장 막강한 실력의 군대로, 1920년 이후 10여 년 간 본격적인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1920년 10월 20~23일 청산리(靑山里) 80리계곡에서 유인되어 들어온 일본군을 맞아, 나중소참모총장, 박영희부관,이범석 연성대장 등과 함께 백운평, 천수평, 마록구 등지에서 일본군과 3회의 격전을 전개, 일본군3,300명을 일시에 섬멸하였다. 이를 청산리전투라 하여 봉오동전투와 함께 독립전쟁사상 최대의 승리로 꼽는다.그 후 부대를 이동, 헤이룽강 부근으로 전진하여 국민회군의 안무(安武), 도독부군의 최진동 등과 연합하고대한독립군단을 결성, 부총재에 취임하였다. 일본군의 격렬한 보복작전의 전개로 1921년 러시아령 자유시로이동하다가 이듬해 헤이허[黑河]사변으로 타격을 받고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1925년 신민부를 창설하여 군사부위원장 겸 총사령관으로 있으면서 성동사관학교(城東士官學校)를 설립,부교장으로 독립군간부 양성에도 주력하였다.1927년 만주의 신민부·참의부·정의부의 3부를 통합하려다 실패하자 민족유일당 재만책진회(在滿策進會)를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취임, 단일단결성을 재촉하였다.1929년 한족연합회를 결성, 주석에 취임하여 황무지개간, 문화계몽사업, 독립정신 고취와 단결을 호소하였다.1930년 1월 24일 중동철도선 산시역(山市驛) 부근 정미소에서 고려공산청년회의 김일성의 감언이설에 빠진박상실(朴尙實)의 흉탄에 맞아 순국하였다.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이 추서되었다.권율장군 1537(중종 32)∼1599(선조 32).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보(溥)의 9세 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했다.즉,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그러나 주장인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해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李詩之)·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오직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후사를 계획했다.한편,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 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웠다.이 싸움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해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 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체찰사 정철(鄭澈)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돌아가 관내(管內)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잠시 주저했으나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고 북진을 계속했다.그러나 앞서 용인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대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그러나 성책을 굳게 해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營柵)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많은 왜병을 베었다.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해 행주산성을 택했다.조경에게 명해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시했다.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그는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그는 행군 중 휘하 병 가운데 4,000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 : 지금의 始興)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이때 휴정의 고제(高弟)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 1,000명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그 뒤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적장들은 이치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성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해 멸하지 않는 이상 큰 위협을 배제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이리하여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행주산성을 공격하겠다는 결의를 제장(諸將)의 중론으로 정하고 조선 침입에서 한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본진장령(本陣將領)들까지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해 맹렬한 공격을 가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했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그 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0x9A57)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다.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그가 임진왜란 대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 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김유신장군 595(진평왕 17)∼673(문무왕 13). 신라의 삼국통일에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한 장군·대신(大臣). 증조부는 532년(법흥왕 19)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의 구해왕이며, 할아버지는 무력(武力), 아버지는 서현(舒玄)이다.어머니는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어머니의 증조부는 지증왕, 할아버지는 진흥왕의 아버지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아버지는 숙흘종(肅訖宗)이다. 숙흘종은 만명을 감금하면서까지 서현과의 혼인을 반대한 바 있다.이는 신라에 투항한 가야 왕족이 당시에 비록 진골 귀족(眞骨貴族)으로 편입되어 있기는 했지만, 왕족 출신과 통혼할 만한 대귀족은 되지 못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에서 금관가야 왕족의 후예들은 신라 왕족의 김씨(金氏)와 구별하여 신김씨(新金氏)라 칭하기도 하였다.≪삼국사기≫는 서현과 만명이 야합(野合)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한편 숙흘종이 만명을 감금한 곳에 갑자기 벼락이 쳐서 만명이 탈출하여 서현과 다시 만나게 되었다는 설화도 전한다. 이러한 설화는 둘의 혼인이 파격적이고 극히 어려운 상황에서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김유신의 출신이 같은 진골 귀족이라 해도 당시 신라를 주도한 대귀족들과는 차이가 있었음도 암시해 준다.이러한 상황은 그가 누이를 김춘추(金春秋 : 태종무열왕)와 혼인시킬 때의 극적인 과정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김춘추와 사통하여 임신한 누이를 화형(火刑)시키려고 하자, 그 사실을 안 선덕여왕이 나서서 극적으로 혼인을 성사시킨 것이다.이는 이 무렵까지도 그의 가계가 왕실과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하기 어려운 처지였음을 보여 준다. 그런데 김춘추와 혼인한 누이는 바로 문무왕과 김인문(金仁問) 등을 낳은 문명왕후(文明王后)로서, 이 혼인의 결과는 그 뒤 그의 일족의 세력이 성장하는 데 큰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아내 지소부인(智炤夫人)은 태종무열왕의 셋째 딸이었는데, 그와 태종의 이처럼 서로 얽힌 혼인 관계는 당시 신라 사회의 관습에 어긋나는 일은 아니었다. 지소부인과의 사이에는 삼광(三光)·원술(元述)·원정(元貞)·장이(長耳)·원망(元望) 등 다섯 아들과 네 딸을 두었다. 그리고 서자로서 군승(軍勝)이 있었다 한다.손자로는 윤중(允中)·윤문(允文)이 있었고, 현손으로는 그의 행록(行錄) 10권을 지었다는 장청(長淸)의 이름이 전한다. 아우로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장군으로 활약한 흠순(欽純)이 있다. 윤중의 서손(庶孫) 암(巖)은 둔갑술과 병법에 능하였다 한다.지금의 진천 길상산(吉祥山)은 고려 때 태령산(胎靈山)으로 불렸고, 김유신의 태를 안치했다 하여 신라 이래로 김유신사(金庾信祠)를 세워, 봄·가을로 국가에서 향(香)을 내려 제사하게 했음이 전해지고 있다. 감금에서 탈출한 만명은 만노군(萬弩郡 : 지금의 충청북도 진천)의 태수로 부임하는 서현을 따라갔고, 그 곳에서 595년 김유신이 출생한 듯하다.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되어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리던 자신의 낭도(郎徒)를 이끌었다. 그 무렵 화랑 수련 과정의 활동은 그에게 수련과 배움의 과정이 되기도 했지만, 이 때 맺은 낭도들과의 유대 관계도 장성한 뒤의 활동에 중요한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신라에 귀화한 가야 왕족인 그의 일족 중에는 전공(戰功)을 세워 두각을 나타낸 인물들을 여럿 찾아볼 수 있다. 신라의 토착 귀족들 틈에서 그들이 활로를 열기 위해서는 스스로 공을 세워 인정받아야 했는데, 그것은 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그의 활동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전투에서의 공로이다. 그가 세운 큰 전공으로 전하는 것 중 최초의 것은 629년 34세 때의 일이다. 당시 신라군은 고구려 낭비성(娘臂城)을 공격했는데, 1차 접전에서 패배하여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다. 이 때 중당당주(中幢幢主)로 출전한 그는 단신으로 적진에 돌입하여 유린함으로써 신라군의 사기를 북돋워 크게 승리하는 데 공을 세웠다.김춘추는 642년(선덕여왕 11) 백제의 침공을 막기 위하여 과거 적대관계에 있기도 했던 고구려에 청병하러 갔는데, 이에 앞서 교섭 과정에서 일어날 위험에 대해 그와 상의하고 서로 목숨을 건 맹세를 했다. 그들은 당시 신라 조정에서 아직 최고 서열에는 들지 못했지만, 보수적인 신라 귀족 사회에서 큰 변화를 일으키게 될 그들의 정치적 결속이 이 때 이미 뚜렷하게 나타난다.이 무렵의 주(州)는 지방 행정 단위로서보다는 군사 작전 구역으로서의 성격이 강하였고, 주에 파견된 군주도 지방 주둔군 사령관으로서의 성격이 컸다. 642년 김춘추가 고구려를 향해 떠날 때 김유신은 압량주(押梁州 :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의 군주가 되었는데, 이 때부터 신라에서 중요한 군사 직책을 맡게 되었다. 이후 그의 활약은 뚜렷해진다.644년에는 소판(蘇判)이 되었고, 그 해 9월 상장군으로 백제 원정군의 최고 지휘관이 되어 전략상 요충인 가혜성(加兮城)·성열성(省熱城)·동화성(同火城) 등 7개 성을 점령하였다. 이듬 해 정월에는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백제가 매리포성(買利浦城)에 침입하였다는 급보를 받고, 가족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출전하여 승리하였다. 그 해 3월에도 귀환하기 전에 또 백제의 침입으로 출동하였는데, 이 때의 유명한 일화가 전한다.당시 전열을 정비하여 즉시 떠나게 되자, 문밖에 나와 기다리는 가족들을 돌아보지도 않고 50보쯤 지나쳐 말을 멈춘 뒤, 집에서 물을 가져오게 하여 마셨다. 그리고는 “우리집 물이 아직도 예전 같은 맛이 있다.”고 말하고 출발하였다. 이에 군사들이 모두 이르기를, “대장군도 이러하거늘 우리들이 어찌 가족과 떨어짐을 한스럽게 여기겠는가.” 하고는 분발하여 나아가니, 백제군이 그 기세만 보고도 퇴각하였다고 한다.또한 647년에는 귀족 내부의 반란 진압에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특히, 그 반란의 결과는 그 뒤 신라 정계의 변화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반란 세력의 우두머리는 당시 귀족회의의 장인 상대등 비담(毗曇)이었다. 그들은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고 주장하며 명활성(明活城)을 거점으로 월성(月城)의 왕족 세력을 공격하였다.반란군과 대치한 지 8일 만에 선덕여왕이 죽는가 하면, 흉조라고 믿어지던 유성(流星)이 월성 쪽에 추락하여 왕실측의 사기는 위축된 반면, 반란군의 사기는 충천해 있었다. 이 때 그는 새로 등극한 진덕여왕과 귀족들을 이치로써 설득하는 한편, 종교적인 제전과 계략으로 왕실 쪽 군중의 사기를 북돋워 반란군과의 결전에서 승리하였다.반란이 진압된 뒤 상대등이 된 알천(閼川)은 신라의 전통적 귀족이었다. 또한 반란의 진압에서 전통적인 귀족들의 힘이 컸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김유신은 가야계 출신이면서도 신라 중앙 정부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큰 구실을 했고, 또 그로 인하여 그의 영향력도 커질 수 있었다.≪삼국사기≫에는 비담의 반란 후 진덕여왕대에 치러진 세 차례의 대규모 전투가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그 전투들에서 최고지휘관을 맡았다. 진덕여왕 1년(647)과 2년의 전투에서는 압량주군주로서 그 일대의 전투를 지휘했으나, 진덕여왕 3년의 전투 당시에는 백제의 대대적인 침입을 막기 위하여 중앙군으로 편성된 군단을 지휘하였다.당시 백제의 지휘관급 100인과 군졸 8,900여 인을 죽이거나 사로잡고 전투용 말 1만 필을 노획했다는 전과를 고려할 때, 신라 쪽에서도 주력부대를 투입한 대규모 방어군단을 편성했음을 알 수 있다. 지휘관 편성을 놓고 보아도 대장군에 김유신, 그 아래 장군들에 진춘(陳春)·죽지(竹旨)·천존(天存) 등이 임명되었는데, 이들은 당대의 명장들이자 정치적으로도 큰 비중을 가지는 인물들이었다.654년에는 신라군대 통수부의 중심적 위치에 서서 새 왕의 추대에 중요한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진덕여왕이 죽자 당시 귀족회의에서는 상대등이던 알천을 왕으로 추대하였다. 그러나 다음 왕에 즉위한 것은 김춘추, 곧 태종무열왕이다.귀족회의의 추대를 뒤엎고 태종이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에 대해, 신라본기에서는 왕에 추대된 알천이 굳이 사양하고 대신 김춘추를 추천하여, 김춘추가 세 번 사양한 다음 부득이 즉위했다고 설명하고 있다.그러나 귀족회의의 결정이 번복된 과정이 실제로 그처럼 평화적이고 순탄했다 해도, 그 이면에는 당시 김춘추를 지지하는 세력이 존재했음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는 그 중요한 지지세력의 하나였던 것으로 보인다.태종무열왕과는 젊어서부터 친분이 있었고 누이동생이 태종무열왕의 비였으니, 그들의 개인적 유대는 대단히 깊었다. 또한 642년의 목숨을 건 맹세에서 알 수 있듯 그들은 정치적으로도 밀착되어 있었다.실제로 그가 태종무열왕의 즉위에 간여하였음은 열전에 나타나 있다. 김유신전에는 그가 알천과 상의하여 태종무열왕을 즉위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귀족들에 의해 왕위에 추대된 알천이 그 문제를 전통적 귀족이 아닌 신흥 귀족 출신과 상의했다는 것을 이해하려면 그 동기를 알아야 할 것이다.≪삼국유사≫에는 중요한 나라 일을 결정하던 4영지회의(四靈地會議)의 구성원으로서 알천·임종(林宗)·술종(述宗)·호림(虎林)·염장(廉長)·유신이 열거되어
광개토대왕고구려 제19대 왕(391~412 재위).대외적인 정복사업을 정력적으로 수행하여 재위기간 동안 고구려의 영토와 세력권을 크게 확장시켰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써서 중국과 대등한 입장을 보였다. 본명은 담덕(談德). 중국측 기록에는 안(安)으로 전한다.영락대왕(永樂大王)이라고도 한다. 제18대 고국양왕(故國壤王)의 아들이다.386년(고국양왕 3) 태자로 책봉되었다가, 391년 즉위했다 가실왕생몰년 미상. 가야 말기의 왕. 혹은 가실왕(嘉實王)이라고도 한다. 가야연맹체의 여러 나라 중 어느 나라의 왕이었는지에 대하여는 학설이 분분하다.금관가야(金官加耶)에 관한 기록인〈가락국기 駕洛國記〉에는 가실왕의 이름이 보이지 아니하므로 금관가야를 제외한 다른 가야국의 왕이었다고 생각되는데, 대가야(大加耶)의 왕이라는 견해, 또는 아라가야(阿羅加耶)의 왕이라는 견해가 있다.또는 가실왕은 곧 금관가야의 취희왕(吹希王)이라는 견해도 있다. 당나라의 악기 쟁(箏)을 보고 열두달의 악률(樂律)을 형상하는 십이현금(十二弦琴), 곧 가야금(加耶琴)을 만들었다. 또 여러 나라의 방언이 각기 다르므로 성음(聲音) 또한 일정하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악사(樂師) 우륵(于勒)에게 명하여 십이곡을 만들게 하였다.이때 우륵이 지은 열두곡은 〈하가라도 下加羅都〉·〈상가라도 上加羅都〉·〈보기 寶伎〉·〈달이 達已〉·〈사물 思物〉·〈물혜 勿慧〉·〈하기물 下奇物〉·〈사자기 師子伎〉·〈거열 居烈〉·〈사팔혜 沙八兮〉·〈이혁 爾혁〉·〈상기물 上奇物〉 등이었다.가야가 망하게 되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에 투항하였는데, 신라의 진흥왕은 그를 국원(國原 : 지금의 忠州)에 두고 가야의 음악을 계승케 하였다. 우륵과의 관계를 보면 가실왕은 신라 진흥왕과 같은 시기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감상평 5
음... 독도는 ㅈㅅ 윤봉길(尹奉吉) : 1908년 6월 21일 ~ 1932년 12월 19일1931년 겨울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1932년 4월 29일 상하이의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의 임무를 맡게된다.윤봉길은 오른손에는 일장기, 왼손에는 물통과 도시락으로 위장한 폭탄을 들고삼엄한 경계망을 뚫으면서 훙커우 공원 안으로 들어가 폭탄을 던져많은 일본관리들을 사망시키거나 부상당하게 한뒤,체포되어 사형을 선고 받고 1932년 12월 19일, 가나자와 육군형무소에서 총살 당했다.중국의 대총통 장제스가 조선에 관심을 갖고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유관순(柳寬順) : 1902년 11월 17일~1920년 10월 12일충청남도 천안에서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1916년 이화학당 보통과에 입학하였고,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에 참가한 뒤,고향으로 내려가 아우내장터에서 독립만세 운동을 지휘했다.일본 헌병대는 가족을 죽이고 유관순을 체포하였다..1920년 서대문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방광 파열로 인해 사망하였다. 안창호(安昌浩) : 1878년 11월 9일 ~ 1938년 3월 10일평안남도 강서에서 안흥국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1895년 교육을 통해 나라의 힘을 길러야 하다는 생각을 하였다.그리하여 구세학당에 입학하여 서구문물과 접하게 되었다.1907년 안창호는 대한사람은 실력을 길러야 한다고 역설하는 계몽활동외에도,1904년 공립협회를 창립하였고1908년 대성학교를 평양에 설립하였으며,1909년 서북학회를 창립하는 등 민족교육활동을 하였다.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으며,1938년 60세에 병을 앓아 사망하였다. 이봉창(李奉昌) : 1900년 8월 10일 ~ 1932년 10월 10일1931년 한인애국단에 가입하고 일본 천황 히로히토 암살 계획을 세웠다.1932년 1월 8일, 이봉창은 히로히토를 겨냥하여 수류탄 2개를 던졌다.근위병 1명이 다쳤으나 히로히토는 다치지 않아 거사는 실패했고 그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비밀 재판을 통해 사형 선고를 받고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김좌진(金佐鎭) : 1889년 12월 16일~1930년 1월 24일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독립운동가이다.놀라운 전술과 전략으로 청산리 전투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으며,1930년 공산주의자 박상실에게 피살되었다. * 청산리전투 :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별 피해가 없었으나, 일본군은 약 1000명을 사살한 아주 큰 승리를 하였다. 김홍집(金弘集) : 1842년~1896년조선후기의 문신이자 정치가이다.1880년 수신사로 일본을 다녀와서,서양 근대의 기술적 성과를 받아들이기 위해서는일본의 문물제도를 배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신사유람단의 일본 파견을 상주하게 하였다.1894년 갑오개혁 때, 정권을 도맡아 여러가지 개혁을 진행햇다. 이상설(李相卨) : 1870년 12월 7일~1917년 3월 2일1907년 고종의 명을 받아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되었다.헤이그 특사들의 임무가 실패로 돌아가자,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힘을 썻다. 이준(李儁) : 1859년 1월 21일 ~ 1907년 7월 14일1907년 헤이그에 특사로 파견되어 외교활동중 사망한 구한말의 외교관이다.그러나 을사조약 체결이 일본에 강제에 의한 것이었음을 폭로하려 했던 계획은영일동맹으로 일본과 외교관계를 맺고 있던 영국의 방해로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이준은 헤이그의 숙소에서 울분을 못 이겨 앓다가 사망하였다. 박영효(朴泳孝) : 1861년~1939년 9월 21일조선 말기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이다.1870년대 중반, 형 박영교를 따라 재동 박규수의 사랑방에 드나들면서 개화사상을 익히기 시작하였다1882년의 제물포조약에 따른 사과 사절로 일본에 다녀왔다.이때 그가 대한민국의 국기 태극기의 원형이 되는 깃발 도안을 처음 그려서 사용했다고 알려져 있다.1884년 갑신정변의 실패로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서재필(徐載弼) : 1864년 1월 4일~1951년 1월 5일1896년 4월 7일 한국 최초의 신문인 《독립신문》을 순한글과 영어로 발간하였다.서재필은 독립신문에서 띄어쓰기를 도입한다고 밝혔다.독립신문을 통해 서재필은 독립된 나라를 만들기 위하여내부적으로는 교육 확대 및 산업 발전을 강조하였고,그를 위해 의무 교육 도입, 서양 과학 기술의 도입,식생활과 위생의 개선에 대한 여러 가지 안들을 제시하였다.그리고 외부적으로는 중립외교를 펼쳐야 한다고 주장하였다.독립신문을 발행하는 일 이외에도, 서재필은 목요일마다 배재학당에 나가 학생들을 가르쳤고,독립협회를 조직한 뒤, 독립문을 건설했다. 민영환(閔泳煥) : 1861년 7월 2일~1905년 11월1905년 11월 30일 을사조약의 체결을 개탄하며,'대한 이천만 동포에게 남기는 글'을 국민들에게 유음을 남기고 자결하였다. 홍범도(洪範圖) : 1868년~1943년1910년 한일 병합 후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군 양성에 힘썼으며,봉오동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이후 청산리 대첩에서 김좌진을 지원하였다. 어윤중(魚允中) : 1848년~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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